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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속회) 공과

22년 11월 - Methodist(1) "상처 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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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sionChurch
댓글 0건 조회 1,502회 작성일 22-10-18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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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신경

* 찬송  -

* 기도  -                                

* 마음열기   

1) 지난 한 달 동안 가장 감사한 일은?

2) 당신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나요?

* 성경 – 갈 5:13-15

* 말씀나눔 : Methodist(1) “상처주지 말라”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1703년에 당시 성공회 사제였던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 사이에서 열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신성 클럽’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매일 밤 규칙적으로 함께 기도하고, 성경보고, 또 공부도 함께 하며 실력과 영성을 키워가게 되는데요, 바로 이때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됩니다. ‘메소디스트’라는 뜻이 뭔지 아시죠? ‘규칙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감리교인들은 한번 약속한 것은 절대로 어기지 않습니다. 주일도 빼먹지 않고, 예배 시간도 잘 지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메소디스트’입니다. ^^

이렇게 시작된 감리교(Methodist) 운동은 영국을 변화시키고 훗날 미국을 변화시키게 되는데,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인이라면 3가지를 꼭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수칙(守則)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하는데요, 이것이 우리 감리교인의 첫 번째 신앙 수칙입니다. 

Do no harm! -  해(상처)를 입히지 말라!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1. ‘충조평판’을 멈추자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당신은 옳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충조평판은 한마디로 ‘바른 말’ ‘바른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군가 나에게 ‘바른 말’했을 때, 그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되던가요? 물론 그 사람은 나를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겠죠.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충고하거나 조언할 때, 상대방을 위해서 그러는 거겠죠.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끄덕여질지 모르지만 가슴에는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제발 그만 멈춰줬으면 하는 바램’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간혹 나를 위해 해준 그 충고나 조언이 나를 더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 책의 저자 ‘정혜신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한 만 배쯤은 더 봤다” 공감이 되시나요?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내가 하는 그 말 속에 ‘충조평판’의 요소가 들어가 있지 는 않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은 그 안에 이미 ‘권력 투쟁’이라는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내 논리로 상대방을 ‘계몽’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계몽과 훈계, 충조평판의 본질은 내 힘으로 남을 바꾸려는 ‘폭력’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충고를 듣거나 조언을 듣거나 평가나 판단을 받으면 기분이 찝찝한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자존감’에 생채기가 났기 때문이죠. 그렇게 자존감에 상처가 나면 듣기 싫어집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괜히 말을 꺼냈나’ 하는 후회감이 밀려옵니다. 충조평판을 한번 당하고, 두 번 당하고, 세 번 당하면... 그 사람에게는 내 속에 있는 것을 꺼내 놓지 않게 됩니다. 왜인가요? 말해봤자 소용이 없으니까요. 또 나만 나쁜 사람 만들게 뻔하니까요. 

그래서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마음을 닫는다고 합니다. 왜요? 아빠는 오늘 또 나를 나쁜 사람을 만들게 뻔하니까요. 엄마는 오늘 또 나를 못된 아들, 못된 딸로 만들게 뻔하니까요. “라떼는 말이야”라고 운을 떼며 “나는 너 만한 나이 때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둥...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자녀라도 충조평판하지 말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공감해 주자!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혀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무엇이 죽음이 엄습해 오고 있는 그 순간에 그녀를 살렸고, 무엇이 성난 군중들의 손에 쥐어진 돌들을 내려놓게 했나요? 예수님의 처방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요 8:6)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으셨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면 왜일까요? 예수님은 왜 그때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혹시 십계명 중 ‘간음하지 말라’는 제 7계명을 까먹어서? 혹시 ‘간음한 여인은 돌로 치라’는 율법을 몰라서? 그건 분명 아닐 것입니다. 성난 군중도, 잡혀 온 여인도, 예수님도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율법으로는, ‘충조평판’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변화시킬 수 없기에 그리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충조평판’에 익숙한 바리새인들은 계속 떠들어 댑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거냐?’고

그러자 그제서야 예수님은 입을 여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이 말씀은 이제 적극적으로 여인의 편에 서서 여인을 보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이 여인의 죄를 정죄하며 죽이고자 하는데, 너희 중에 죄 없는 이가 있는가?’라는 반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일 수도 있는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남아 그녀의 곁을 지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과 아는 사이도 아니고, 오빠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다칠 수 있는 왜 그 상황에서 백마탄 기사처럼 여인과 군중 사이에 서서 온몸으로 이 여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여인은 죽게 되니까요!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라고 떠나는 순간, 이 여인은 돌무덤이 될게 뻔하니까요!. 

이제 이 여인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볼까요? 그때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자신의 몸으로 군중들을 막아서며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고 있을 때, 이 여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맞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안도감이 들었겠죠. ‘모두가 다 내 적인 줄 알았는데,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지금 바로 그 감정이, 그 느낌이 우리가 받고 싶은 느낌 아닌가요!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에게도 필요한 감정과 느낌이 바로 그 느낌 아닐까요! 바로 그것이 여러분의 아내에게 필요하고, 여러분의 남편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기억하십시다. 바른말이나 똑똑한 말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공감해 주는 말이 우리 영혼을 살리고, 우리 마음을 치유하고,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돌맹이를 내려놓게 만든다는 사실을!


3. 공감은 하되 과제는 분리하자. 

‘과제의 분리’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 나오는 표현인데 제가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이런 의문이 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그렇게 무조건 감싸주고, 무조건 공감해 주고, 무조건 용서해줘야 하나요?” “그렇게 자녀를 어떻게 키우나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이 여인을 변화시키고, 어떻게 성난 군중의 손에서 돌을 내려놓게 했는지, 그 “순서”에 주목해 보십시오. ‘충조평판’을 아예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충고나 조언이 쓸데없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그 순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난 군중들이 돌맹이를 내려놓고 떠난 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 8:10).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그녀가 자기 자신과 마주할 기회와 시간을 주고 계십니다. 왜인가요? 그녀의 문제는 그녀 자신만이 풀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녀의 과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장면을 유심히 보십시오. 성난 사람들도 다 사라졌고, 심지어 방금전까지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남자도 어디에 갔는지 안보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어줬나요? 그녀의 남편이 되어줬나요? 아니면 그녀의 남은 인생을 책임줘 줬나요? 아니죠! 분명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을 자주 망각하며 삽니다. 한마디로 ‘과제의 분리’가 잘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가끔 상대방이 내 바운더리를 침범하도록 나 자신을 방치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상대방의 바운더리를 아무 생각없이 침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있죠.이 말씀을 유심히 보십시오. 예수님은 명확하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안에 있는 죄의 문제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과제의 분리입니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나옵니다. 중학교 3학년 아들이 담배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엄마가 알게 됐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춘기니까 그러려니 하며, 공부가 힘드니까 그러려니 하며 어깨를 다독거려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나는 미성년자여서 담배를 살 수 없으니까 엄마가 대신 담배 좀 사다주면 안돼’라고 부탁했을 때, 아들을 대신해서 담배를 사다 줄 수는 없는 거죠! 그런데 과제의 분리가 안 되면, 담배를 사다 주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명확하게 과제를 분리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공감하되 과제를 분리할 줄 아는 지혜를 배워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 자신도 지키고, 상대방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삶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어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린 늘 무엇을 말하느냐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때론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다. 입을 닫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잘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DO NO HARM!”의 삶은 결국 말에 달려 있습니다. 충조평판을 멈추고 공감해 줄 때, 공감하되 과제를 분리할 줄 아는 지혜를 얻게 될 때, 우리 입술을 통해 이 세상은 더욱 살맛 나는 세상이 되어갈 줄 믿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요한 웨슬리의 후예(後裔) 됩시다!  


* 결단과 중보기도 

1. ‘충조평판’을 멈추겠습니다. 

2. 공감과 이해 가득한 가정과 속회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3. 영육간에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형제자매들을 돌보시고 치유해 주소서.(중보기도) 


* 속회 헌금 - 찬송 ________  장

* 헌금 기도 - 인도자

* 광고 – 속장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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